백두대간 20차산행(2016.02.14)
소백산 구간 : 소백산 도솔봉
☞ 교통편 : J-Camp
☞ 코스 : 저수령850~촛대봉1080~투구봉1118~배재~싸리재~뱀재~솔봉1103~묘적재~묘적봉118~
도솔봉1315~삼형제봉~죽령689
이 코스는 전체적으로 등로가 뚜렷하며 이정표가 잘 되어있다
황장산,만복대를 뒤로하니 편안한 육산이며 소백산이 가까워 진걸보니 능선의 바람들이 매몰차다..
오늘은 비,짓눈개비,사래기,우박,마지막으로 눈까지 한겨울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것을 경험 했다
심지어 바닥은 낙엽밑에 숨겨진 얼음 산행길...
미끄러워 혼났다..
저수령..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길어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명이 고개의 지리적 환경에서 유래한다나??
해발850m 조선후기 회령이라 불려졌다
이 고개를 넘어오는 외적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는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촛대봉..
오늘 첨 만난 봉우리..오늘도 몇개의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촛대봉 사진이 없네???
누군가 지나면서 찍어주긴 했는데...
투구봉
촛대봉을 얼마지나지 않아 만난다..
시루봉
촛대봉을 오른후에는 큰고도차가 없다..
혼자이니 어쩔수 없이 ..셀카로..
엥??
그네가 있네..ㅎㅎㅎ
무명봉
대간길 마루금에 1000m가 넘는 이름없는 봉우리들이 많다..
그냥 몇 미터 봉??
그 많은 무명봉들이 언제 그이름을 찾을 지...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붙여줄지???
솔봉
소백산 자락이 모습을 나타낸다..
솔봉 ...표시 깃발은 뒤에 가려지고...ㅎㅎㅎ
사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넘 추워서..
묘적봉
묘적령 안내 이정표에서 자구지맥 방향을 잠시내려서야 묘적령 표시석을 볼수 있다
소백산국링공원 최남단..
묘적사가 있던봉이라 하여...묘적은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도솔은 장차 부처가될 보살이 사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니 산길은 그저 산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길이기도 하다.
도솔천하로 가는길.....
뒤로 희미한 조망이 보이고...
축복인지 고행인지 산행인지 판단이 안되네....
뇌가 얼고 있다...ㅎㅎㅎ
위험구간 계단까지 잘 정비가 되어있다..
도솔봉..
육산이지만 역시 정상일대는 암릉지역..그나마 계단 조성도 잘되어 있다
북서쪽은 삼형제봉 과 1286봉..
우측으로 길게 내려서는 대간길이 죽령으로 향한다
북쪽의 소백산 주릉이 휘몰아치는 눈발에 가려 어렴풋이 보이네
갑자기 소백산 칼바람이 생각나네..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과 같이 아름답다 하여....
눈발과 바람이 거세지니 여러가지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흰봉산 갈림길...
도솔봉에서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고 숨이 턱에 차야지만 삼형제봉을 통과
20여분 운행하면 출입금지 시그널을 우회하여 3.3km 부드러운 내리막이 중령까지 이어진다
2014년 조난사고가 난 자리..
조신히 머리가 숙여지네...
죽령..
신라사람 죽죽이 길을 개설하였다 하여 죽령...
한때 고구려와 국경 이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과거 길..
보부상들 과 나그네들의 숱한 추억이 묻힌곳..
소백산 허리로 구름도 쉬어가는 아흔아홉굽이의 깊은 산속..
퍼옴(제이캠프 백두3차 우보선생)...
저수령 부터는 소백산 줄기이다.
저수령에서 부터 소백산 비로봉(1.439m)을 잇는 봉우리들은 마치 하나의 산인듯 서로 부르며
다가서고 있다.
봉우리들은 소백산의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을 향하고 있다.
비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줄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이다.
즉 부처의 진신(眞身)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저수령에서 고개숙이고 산길로 들어서면 불 밝혀 인도하는 촛대봉을 만나게
되고 땀흘려 올라가면 묘적봉(妙積峰)과 도솔봉(1.314m)을 오르게 된다.
묘적은 참선하여 삼매경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도솔은 장차 부처가될
보살이 사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니 산길은 그저 산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길이기도 하다.
붉밝혀 진리의 길을 인도하는 춧대봉을 지나 참선을 통해 삼매경에 든후 도솔천에 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그렇게 도솔봉을 지나면 바로 사바세계에 내려오신 부처님을 상징하고 세속에 드러난 진리를
상징하는 연꽃이 봉오리를 틔운 연화봉이다.
그 연화봉에서 진리의 삶을 이루게되면 바로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인 비로봉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소백산 비로봉을 향하는 산행은 그것 자체가 수행이요 깨달음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산이요 하나의 진리요 하나의 깨달음이요 하나의 산행이며 하나의 마음이다.
싸리재라는 이름은 신라시대에 지어진 이름으로 싸리재는 싸리고개이다.
싸리는 신라의 이두문자의 해석으로 사리 솔이(松)므로 솔재라고 부를 수 있어나
옛부터 사리로 불러 왔기때문에 그대로 부르는 같다.
단양지역에는 순 우리말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흙목재는 한자로 풀이하면 토항(土項)이다.
중국의 풍수지리에 밝은 박성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를 지낼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토향(吐香)이라고 하는데 토향이 토항으로 변이음이 되어 우리말 풀이로
흙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흙목재 밑에 예천군 상리면 두성리에 흙목 마을이 있다.
도솔봉(兜率峰)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도계에 위치하여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과 함께 소맥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대동여지도에는 도솔산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도솔천에 따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솔산에는 도솔산성이 있는데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동강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성은 한국전쟁당시 모두 사라 졌다고 한다.
도솔천(兜率天)은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慾界六天)중 사천(四天)이다.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는 만족시키다의 의미로 설명하여
지족 묘족 희족 희락(知足,妙足,喜足,喜樂) 등으로 번역한다.
장차 부처가될 보살이 사는곳으로 현재는 미륵보살이 여기에서 설법하며 남섬부주에 하생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정토신앙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천(四天)은 수미산 꼭대기에서 12만 유순되는 곳에 있으며 이곳에서 미륵보살이 산다.
여기에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대중이
환락하는 장소라고 한다.
유순은 예전에 인도에서 거리를 재던 단위로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면 대유순 60리면 중유순 40리면 소유순 세가지가 있고
정토는 부처와 미륵보살이 사는 곳으로 번뇌와 구속에서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말한다.
죽령(竹嶺)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을 잇는 고개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 3월에 이 길을 열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 죽죽이라는 사람이 왕의 명을 받고 죽령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직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위로하기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으로 삼국시대에 전쟁이 잦은 곳으로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장수왕 말년 신라 진흥왕12년에 거칠부등 여덟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침공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뒤 영양왕 1년 고구려
장수 온달장군이 왕께 자칭하여 죽령이북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죽령은 군사적 요충지 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과 9년에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단양 문화원이 펴낸 단양 민속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신라시대때 부터 죽령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죽령사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춘추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의 죽령사를 짓고 산신제를 지내게 된것은 조선 중기로 이때 신주인 산신이 바로 다자구 할매다. 당시 나라에 바치는 세금은 삼베및 무명 엽전등을 지고 이고 죽령을 지나야 했는데
죽령 고갯마루에 산적들이 가지고 간 세금을 빼앗고 사람을 헤치지만 관병들이 이를
토벌하지 못했다.
그때 두아들을 잃은 할매가 나타나 토포군의 토벌작전에 할매가 작전을 구사했는데
할머니는 산적 소굴로 들어가 두 아들을 잃었는데 아들 이름이 하나는 들자구야이고
다른 하나는 다자구야라고 했다.
관군과의 암호 형식인 들자구야는 들자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신호이고
다자구야는 다 자고 있으니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그 할머니의 다자구야 신호를 받은 관군이 들이 닥쳐 산적을 섬멸 했다는 이야기다.
이후 노파가 죽어 산신령이된 다자구 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때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 시켰다.
그러나 죽령 산신제는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히 맥을 이어왔다.
그 이후 김순재라는 면장이 부임하면서 죽령산신제를 지내는 재산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분양해준뒤 다자구 할매 산신 재산이 없어 졌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이 군청이나 문화원에 돌려 줄것을 사정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지금은 약 50만원 정도의 군 지원금으로 겨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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